[[감기걸린개구리]]시한부 | 　우수지대작가１ 감기걸린개구리 | 조회 804 | 2009/02/17 19:20:38 그 사람을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내 평생의 마지막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괜찮을 것만 같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그 사람이 마지막이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시한부 죽음이 느껴진다. 죽음이라는 그 잔인한 것이 내 등 뒤까지 바짝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특별히 몸이 더 아파진 것은 아니었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느낌 같은 것이 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었다. 사실, 죽음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조금 더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그리고 너의 곁에서 내가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하지만 신은 잔혹하게도 내게 아주 짧은 시간만을 허락해 주었다. 나는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고, 너의 곁도 떠나야 했다. 딩동, 하는 작은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방금 전, 나를 찾아온다는 너의 전화를 받고,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염없이 너를 기다렸다. 내가 문을 열자, 너는 해맑은 웃음과 함께 내 집으로 들어왔다. 너의 그 웃음으로 인해, 집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죽음의 향기로만 가득 채워졌던 나의 집이, 너로 인해 산뜻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집, 여기는 내가 마지막 자리로 선택한 곳이었다. 병원에 힘없이 있는 나의 모습을 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감독님! 나 기다리고 있었죠? 그럴 줄 알고 빨리 왔어요.” “기다리긴. 들어 와.” “치. 난 감독님 주려고 맛있는 전복죽도 싸왔는데, 나 혼자 다 먹을까 보다.” 입술을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너 때문에, 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는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에 죽이 든 보온병을 내려놓았다. 나는 소파에 걸터앉아서 너를 지켜보았다. 너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너와 내가 만난 것이 벌써 1년 전이었다. 나는 꽤나 인기 있는 영화감독이었다. 젊은 나이에 영화계에 들어와서, 수많은 영화를 만들었다. 내 평생은 영화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오직 영화만을 알고, 영화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촬영장에서의 나는 비인간적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영화는 내 인생의 전부였고, 그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했다. 그런 내게 너라는 아이가 다가왔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나서, 내 일생의 마지막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마지막인 만큼,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영화 캐스팅을 위해 오디션을 보는데, 처음부터 네가 눈에 띠었다. 극 중 배역과 딱 맞는 너를 보고서 처음부터 캐스팅을 마음먹었지만, 나는 신인이었던 너를 시험해 보기 위해 너를 힘들게 했다. 여러 차례의 오디션 끝에 결국 너는 내 영화에 캐스팅 되었고, 나는 내 마지막 영화를 위해 촬영을 서둘렀다. 마지막이라서 더 간절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나의 마지막 영화를 꼭 완성시키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촬영장의 나는 평소보다도 몇 배로 예민하고, 차가웠다. 그런 나에게 너는 항상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말괄량이 같은 너는 항상 내 곁에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와 함께하는 시간동안에는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까지는 내가 살아있다는 그것이 느껴졌다. “감독님! 따뜻할 때 먹어요. 이거 우리 엄마가 한 건데, 진짜로 맛있을 거예요.” “안 먹어.” “에? 왜요? 먹어 봐요. 어서요.” “입 맛 없어.” “입 맛 없어도 먹어야 해요.” 너의 커다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런 너의 모습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소파에서 내려와 앉았다. 너는 내 손에 작은 스푼을 쥐어주었다. 너는 내가 전복죽을 먹는다는 사실이 기쁜 건지, 예쁘게 웃고 있었다. 너의 눈가는 아직도 촉촉이 젖어있는데, 너는 정말로 예쁘게 웃었다. 내 생애의 마지막 영화 촬영을 반쯤 끝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았다. 진통제라도 넉넉히 받아둘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병원을 찾았던 기자에 의해, 나의 병이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폐암 말기.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일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암치료도 받지 않았다. 추한 모습으로, 단 하루라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싫었다. 내가 만들던 그 영화처럼, 그렇게 죽어가고 싶었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는 너로 인해 항상 웃었지만,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영화 촬영 도중, 나의 시한부 인생을 알게 된 너는 죽지 말라며 내 팔을 부여잡고 울었다. 너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언제나 예쁘게 웃던 너인데, 나로 인해 울었다. 나로 인해 그렇게 눈물을 토해내었다. 영화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나의 인생인데, 처음으로 너라는 사람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다. 너는 내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촬영을 거부했다. 내가 빨리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죽어도 영화같이, 내가 만들던 그 영화 같이 죽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었다. 나는 너에게 말했었다. 죽기 전에, 꼭 이 영화를 완성하고 싶다고. 나의 간절한 목소리에 너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촬영해 주었다. “감독님! 내일이 기자 시사회인 거 아시죠? 나 정말 떨려요! 내 첫 영화잖아요!” “영화 보고, 네가 뭐가 잘못되었는지 똑똑히 기억해둬. 그리고 다음 영화는 더 잘 찍어.” “치, 좋은 말 한 번 해주면, 어디 덧나나?” “칭찬 하면, 금방 거만해져서 안 돼.” “치. 그리고 나 이제 영화 안 찍을 거예요.” 나는 너를 보며 뭐?, 라고 되물었다. 이제 영화를 찍지 않겠다는 말이 대체 무엇인지. 너는 이제야 갓 영화 하나를 찍은 신인이었다. 내 영화로 인해 주목을 받으면, 너의 화려한 날들이 열렸다. 너는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면, 너는 곧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니. “드라마는 찍어도, 영화는 안 찍을래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감독님 영화가 아니면, 찍기 싫어요.” 그렇게 말하며 너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나는 너의 미소보다, 네 눈가에 있는 그 눈물에 눈이 갔다. 속이 먹먹하고, 답답했다. 나는 쓸 데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너를 다그쳤다. 너는 금세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죽어가고 있는 나 때문에, 곧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나 때문에, 너의 화려한 그 인생을 내려놓는 것이 싫었다. 너는 멋진 배우가 되어야 했다. 카메라 앞에서 너의 열정을 마음껏 뽐내야 했다. 그리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아, 감독님! 나 자랑할 거 있어요.” “자랑?” “네! 저 다음 주에 CF 찍는대요. 카메라 광고요! 잘 됐죠?” “그래, 축하해.” 너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겉으로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정말로 많이 축하하고 있었다. 네가 이루고 싶었던 그 꿈을 이루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너는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서, 멋진 배우가 될 것이었다. “다 감독님 덕분이에요! 그거 광고 찍고 나면, 나한테 카메라 신제품 하나 준대요. 그거 받으면, 우리 둘이 사진 찍어요. 우리 사진 한 번도 안 찍은 거 알죠?” “뭐래. 사진을 안 찍긴. 영화 촬영 마치고 배우, 스텝들 다 같이 찍었잖아.” “치. 우리 둘이선 안 찍었잖아요. 그리고 그 사진 나 너무 못나게 나와서 맘에 안 들어요.” 너는 투덜대면서 말하였다. 나는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에게 내 마음을 주는 것이 두려웠다. 너는 점점 내게로 다가 왔는데, 나는 그런 너를 내치기에 바빴다. 내가 시한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너에게 내 마음을 줄 수가 없었다. 죽어가고 있는 나는 너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네가 내 마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너에게 줄 수 있는 나의 사랑은 길어야 일 년이었다. 그런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죄와 같았다. 너는 내게 너의 마음을 주었는데, 나는 차마 내 마음을 줄 수가 없었다. 언제 갑자기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옆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갑자기 마른기침이 나왔다. 목에서 가래가 끓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하며, 나는 화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너에게 나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너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며 내 뒤를 따랐다. 나는 네가 들어오지 못하게 화장실 문을 잠가 버렸다. 세면대를 부여잡고 마른기침을 뱉어내었다. 나는 기침이 멈추자 입에 대었던 손을 떼었다. 나의 손바닥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듯 아팠다. 암 덩이가 갈비뼈까지 전이가 된 모양인지, 흉통이 심했다. 나는 내 손에 묻은 피를 물로 씻어내었다. 죽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게 다가 왔다. 이제 너와도 헤어져야 했다.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네가 내 평생의 마지막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괜찮을 것만 같다. 너에게는 내가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네가 마지막이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한다. “감독님! 감독님, 괜찮아요?” 너는 문을 두드리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물로 깨끗이 씻어내고, 입도 한 번 헹구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화장실의 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너는 눈물을 눈에 머금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래서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이렇게 힘들어 할 네 모습을 알기에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에는 너에게 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결국 너에게 항복을 하고, 내 마음을 내주고야 말았다. 내가 영원토록 네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와 내가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서, 둘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죽음은 내 등 뒤에 있었고, 나는 희미해져가는 나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미지근한 물에 진통제를 삼켰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진통제로도 통증이 사라지질 않았다. “감독님! 괜찮은 거죠?” “괜찮아. 너 이제 그만 가라. 내일 보자.” “…감독님.” “가. 내일 시사회도 있으니까, 집에 가서 팩이라도 해.” 내 말에 너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너의 표정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지만, 나는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너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을 네가 알아주었으면 했다. 내가 죽어가는 그 모습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는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껴야 했다. 그리고 좋은 배우가 되어야 했다. 너는 힘없이 몸을 돌려 나의 집에서 나갔다. 네가 집에서 사라지자, 나의 집에는 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둡고, 무거운 공기만이 남았다. 살아있다고 느꼈던 너와의 시간은 사라지고, 다시 죽음만이 느껴졌다. 나는 힘없이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여기까지라도 버텨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 마지막 영화도 완성을 하였고, 내일이면 네가 연기한, 우리의 영화를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내 몸이 내일까지만 버텨주었으면 했다. 네가 연기한 우리의 마지막 영화를 함께 보고나서라면 죽어도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너를 내 눈에 담고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내 가장 큰 행복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거칠어 졌다. 나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감고 나타나는 검은 세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도 나는 억울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었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처음으로 나의 인생을 후회했다. 영화에 미쳐 담배를 입에서 한 순간도 떼지 않았던, 지난 나의 세월을 후회했다. 너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너를 마음에 품고 나서,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졌다. 시사회가 있는 날은 왠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죽음에 다가갈수록 잠이 많아졌는데, 웬일인지, 이른 아침에 눈이 절로 떠졌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나는 다리에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옷장을 뒤져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블랙 슈트를 찾아내었다. 마지막 힘을 내어 옷을 갈아입고는 숨이 모자라 침대에 몸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죽음은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견뎌주기를. “신석현, 나 왔다. 준비 다 됐냐?” 내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온 준민이가 내 방까지 왔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다. 준민이는 방문턱에 서서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나는 걱정 말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네가 내 영화 속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을 보아야 했다. “가자. 곧 시사회 시작이야.” 나는 준민이를 보며 말했다. 준민이는 나를 부축하여 차까지 데려갔다. 차에 올라타서 나는 창밖만 멍하니 보았다. 마지막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자꾸 느껴졌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진통제를 꺼내어, 물도 없이 삼키었다. 목이 따가웠다. 내가 자초한 병이었다. 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나였다. 그런데, 나의 삶이 왜 이리도 억울한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변함없이 내 머리를 때렸다. “왜 무리를 해. 시사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했잖아.” “감독이 없는 시사회는 의미 없어. 내 마지막 영화에 내가 없는 걸 말이 안 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네가 없는 것도 말이 되질 않아. 준민이는 운전을 하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말을 할 힘이 남아있질 않았다. 시사회가 열리는 명동에 도착하고, 나는 준민이의 부축을 받으며 시사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사회장으로 가는 도중에 취재진들이 나를 귀찮게 하였다. 나는 카메라 앞을 지나면서 어설프게 웃었다. 내 마지막 영화를 보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다. 너를 보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와주었어. 해정아, 느껴지니? “감독님!” 내가 시사회장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자, 뒤이어 안으로 들어온 네가 나를 불렀다. 너는 예쁘게 화장도 하고, 너에게 잘 어울리는 심플한 블랙 드레스도 입었다. 너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환하게 웃었다. “감독님. 나 어때요? 오늘 예쁘죠?” “예쁘긴 무슨.” 응, 정말로 예뻐. “근데, 나 너무 긴장해서 오다가 삐끗했어요. 카메라에 찍혔을 텐데. 아유, 창피해.” “잘 하는 짓이다.” 조심하지 그랬어. 다치진 않았지? “아, 떨려. 감독님, 나 화장실 잠깐 다녀올게요!” 너는 나를 보며 살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시사회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제 잠시 후면 시사회가 시작할 텐데. 나는 네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계속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흉통이 느껴져 진통제를 또 삼키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내 곁에 네가 있어서 조금이나마 덜 아플 수 있었다. 미련 없었던 내 삶에 너라는 미련이 남았다. 영화만 알고, 영화만 보며 살아왔던 내 삶에 너라는 빛이 생겨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네가 있어서 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웃을 수 있었다. 해정아, 내가 네 곁에 오래도록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네가 화장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사회는 바로 진행이 되었다. 진행자의 소개로 너와 배우들이 소개되었다. 무대 위에 올라갈 힘도 남지 않은 나는, 객석에 앉아서 너를 보았다. 다른 배우 사이에서도 네게 빛이 났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너의 모습이 영원했으면 했다. 카메라 셔터가 바쁘게 터지고, 네가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신인배우, 서해정입니다.” 너는 밝게 인사를 하였다. 오늘 너는, 내가 본 어떤 순간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너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많은 카메라 앞에서도 당당하고, 예쁘게 웃는 너를 보았으니, 나는 이제 정말로 떠나도 미련이 없을 것 같다.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야 한다. “그럼, 신석현 감독의 마지막 영화인 ‘유리병’의 상영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그 말과 함께 시사회장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 귓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감독님! 나 잘했어요? 떨려 죽는 줄 알았어요.” 나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다른 누구보다도 빛이 났다. 나는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 생의 마지막 영화였다. 내 모든 열정을 다 바친 영화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스크린 속의 네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편집을 하느라 수없이 돌려보았던 장면들인데도, 너는 내 머리와 내 마음 속에 새로운 느낌으로 새겨졌다. 잘 버텨주었다. 네가 내 영화 속에서 숨 쉬는 것까지 함께 볼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여기까지 버텨주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아저씨, 내 곁에 언제까지나 있어 줄 순 없는 거예요?’ 영화 속의 네가 말했다. 가슴이 짠해지고, 코끝이 찡했다. 자신을 떠나는 남자 배우를 보며, 네가 간절한 목소리로 나왔다. 그 말이 마치 나를 향해 하는 말 같아서 슬펐다. 이 장면을 찍을 때, 너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엉엉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런 너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정말로 슬펐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너에게 표현할수록 네가 아플 것이란 것을 알았기에, 나는 언제나 많은 것을 표현하지 않았다. 너에게 아픔을 남겨주는 내가 미웠다. 엔딩 크레딧이 천천히 올라갔다. 나는 그와 동시에 눈을 감았다. 숨이 차올랐다. 죽음이 내 등 뒤에서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 올랐다. 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너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통증을 참아내려고 애썼다. 부질없는 짓임을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진통제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 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거친 숨소리에 결국 네가 내 쪽을 보았다. “감독님!” 너는 내 손을 잡았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떠 너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너를 내 눈에 담았다. 너의 곁에서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 마지막 사랑이 너일 수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너의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없음이 슬펐다. 너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죽지 말아요. 죽지 말아요, 감독님! 감독님! 죽으면 어떡해! 내가 성공하는 거 봐야죠! 응? 죽지 마. 죽지 마요, 감독님.” 너는 눈물을 쏟아내면서 말하였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가면서, 그 아래로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너는 내 손을 꼭 잡고서는 스크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내 마지막 영화를 내 마지막 사랑에게 바칩니다. 네가 있어서 내 마지막이 행복했다. 사랑한다.’ 아까울 것 없는 인생이었다. 나는 너라는 미련만을 이 세상에 남겨둔 채, 이렇게 떠난다. ★